탐욕과 분노,어리석음과 싸우라.이 세 가지야말로 우리의 적이다.우리는 법과 인내심에 의지하여 싸워야 한다.온갖 감흥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속세와 법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법이 있는 곳에 속세가 있고 속세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번뇌가 있으면 번뇌를 정복하는 자,번뇌와 싸우는 자가 있다.이것이 내면의 전쟁이다.바깥 세상에서 전쟁을 할 때 사람들은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쏜다.정복하고 정복당한다.상대를 정복하는 것,이것이 속세의 방식이다.그러나 법 수행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복하는 대신 변화하는 감정에 인내심으로 저항하고 견딤으로써 마음을 정복해야 한다.
수행을 할 때는 분노나 증오의 감정을 품지 말고 모든 행동과 생각에서 악의,시기,분노를 떨쳐 버려야 한다.분노와 원한을 품지 않아야만 증오심을 극복할 수 있다.분노와 원한은 종종 보복으로 이어진다.해로운 행동의 고리를 끊기로 결심했다면 보복이나 적개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우리는 그런 행동을 모두
업으로 본다.보복은 '네가 나에게 이런 짓을 했으니 나도 똑같이 갚아 주마,'라는 생각으로 업을 지속하는 것이다.그런 업에는 끝이 없다.보복은 다시 보복을 부르고 증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이런 식으로 업을 짓다 보면 악순환이 반복되고 증오는 계속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속세의 모든 존재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붓다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증오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지혜로운 자라면 세상을 들여다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한 나라의 왕자로서,붓다께선 다양한 병법을 익혔지만 그런것들이 다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그것은 속세의 전쟁과 공격에 국한된 기술이었다.속세를 떠난 승려로서 우리는 해로움과 불화를 일으키는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자신을 정복해야 한다.전쟁을 하되 번뇌와 싸워야 한다.탐욕이 있으면 탐욕과 싸워라.분노가 있다면 분노와 싸우라,어리석음이 있다면 어리석음과 싸우라.
이것이 바로 법의 전쟁이다.마음에서 치러지는 이 전쟁은 참으로 힘겹다.사실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전쟁이다.이 전쟁에 대해 명상하고 탐욕과 분노,어리석음과 싸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은 승려가 된다.이것이 승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사실 이런 싸움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것들과 싸우고 번뇌와는 거의 싸우지 않는다.번뇌를 보는 경우도 드물다.뭇다께선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버리고 계율을 개발하라고 가르치셨다.이것이 바른 길이다.이 길에 들어선 이상 우리는 배워야 한다.속세의 학생들처럼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직업을 갖기 위해 지식을 쌓고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는 결코 쉽지 않다.따분해지거나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다시 추슬려 공부해야 한다.그래야만 졸업을 하고 직업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승려들의 수행도 비슷하다.명상과 수행에 정진하면 언젠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선을 악으로 보든 악을 선으로 보든 우리는 세상을 본다.견해를 갖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문제는 그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다.마치 진리인 것처럼 그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다.그러한 집착 때문에 길을 끝내지 못한 채 생과 사의 윤회 속에 맴돌게 된다.그래서 붓다는 견해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승려들이 모여 사는 사원처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에서는 서로의 견해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편안하게 수행에 정진할 수 있다.그러나 견해가 충돌한다면 두세 명이 함께 살기도 쉽지 않다.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도 모두 자신을 낮추고 견해를 버린다면,삼보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여럿이 함께 모여 산다고 해서 반드시 불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노래기를 보라.노래기는 다리가 참 많다.저렇게 많은 다리로 어떻게 걷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나름대로의 리듬과 질서가 있다.우리의 수행도 그와 똑같다.승가의 훌륭한 수행자들처럼 수행한다면 어렵지 않다.그들은 열심히 수행하는 자,바르게 수행하는 자,고통을 초월하기 위해 수행하는 자,적절한 방법으로 수행하는 자이다.이 네 가지 덕목을 우리 마음에 쌓는다면 진정한 승가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백 명이 모였든 천 명이 모였든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제각기 다른 곳에서 왔지만 모두 똑같다.비록 견해가 다를지라도 바르게 수행한다면 불화가 없다.바다로 흘러드는 강줄기와 같다.바다로 흘러든 물은 모두 똑같은 맛과 색을 지니게 된다,법의 강에 들어서면 모두가 하나의 법이다.태어난 곳이 달라도 모두 조화를 이루고 화합한다.
견해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갈등과 논쟁이 생겨난다.집착이 필요 이상으로 견해를 붙잡게 하지 말라.붓다께선 알아차림 즉,사티의 중요성을 역설하셨다.서 있을 때나 걸을 때,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우리는 항상 알아차림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알아차림이 있으면
자신을 보고 마음을 볼 수 있다.몸 안의 몸,마음 안의 마음을 볼 수 있다.반면 알아차림이 없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알아차림이중요하다.항상 알아차림을 지니고 있어야 붓다의 법을 들을 수 있다.형태를 보는 눈,소리를 듣는 귀,냄새를 맡는 코,맛을 느끼는 혀,감각을 느끼는 몸이 모두 곧 법이기 때문이다.이런 감흥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그 또한 법이다.따라서 항상 알아차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항상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것이다.항상 법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깨어 있음의 상태가 곧 '아는 자'즉,'붓다'이다.알아차림과 깨어 있음이 있으면 깨달음이 따른다.세상을 알게 되는 것이다.눈이 형태를 보면 그 형태가 본래의 것인지 아닌지 안다.귀가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본래의 소리인지 아닌지 안다.해로운 것인지,그릇된 것인지,옳은 것인지 안다.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깨달음이 있으면 항상 법을 듣는다.우리는 법의 한복판에서 법을 배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앞으로 나아가든 뒤로 물러서든 온통 법이다.우리에게 알아차림이 있으면 세상이 온통 법이다.숲 속에서 뛰어다니는 동물을 바라볼 때도 우리가 그들과 똑같음을 본다.그들도 우리 인간처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하고 행복을 추구한다.인간과 똑같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피하려 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본능을 지닌 똑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이런 명상을 수행이라고 한다.수행은 진리로 세상을 보고 모든 생명체가 생로병사의 동반자임을 깨닫는 것이다.우리는 알아차림을 지녀야 한다.알아차림이 있으면 마음의 상태를 볼 수 있다.생각할 때나 느낄 때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이러한 앎을 '붓도'.'아는 자'혹은 '철저히,분명히,완전히 아는 자'라고 한다.완전하게 아는 마음은 바른 수행의 길을 찾는다.오 분 동안 알아차림이 없다면 오 분 동안 미쳐 있고 오 분 동안 방심한 것이다.알아차림을 지니는 것은 자신을 알고 마음의 조건을 알고 삶을 아는 것이며,깨달음과 분별력을 갖고 항상 법을 듣는 것이다.날마다 수행에 정진하라.의욕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수행하라.하고 싶을 때만 하지 말라.기분에 따라 하는 수행은 법이 아니다.밤이나,낮이나,마음이 평화로울 때나,그렇지 않을 때나 상관없다.오직 수행하라.수행도 마찬가지이다.서 있을 때나 걸을 때,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알아차림을 지니도록 노력하라.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다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이다.마음이 평화로우면 명상도 한결 쉬워진다.그 둘은 서로 협력한다.항상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라.마음은 그렇게 훈련하는 것이다.
'南海記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순간 문제를 해결하는 법 (0) | 2009.06.19 |
---|---|
왜 명상을 하는가 (0) | 2009.06.19 |
치우치지 않는 마음 (0) | 2009.06.18 |
죽음을 앞둔 이에게 (0) | 2009.06.18 |
죽음을 앞둔 이에게 (0) | 2009.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