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有無유무중도이다.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하여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없다고 말한다.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에 집착하고 묶여서 자아가 있다거나 혹은 없다는 견해,자아가 영원히 있다거나 혹은 없다는 견해,자아의 실재에 생각이 있다거나 혹은 없다는 견해를 일으킨다.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생성하는 것을 여실히 본다면 없다는 견해는 생기지 않으며,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소멸되는 것을 여실히 본다면 있다는 견해는 생기지 않는다.인과 연에 따라서 오취온이 일어날 뿐이고,인과 연에 따라서 오취온이 소멸할 뿐이다.인과 연을 여실히 본다면 오취온의 생성소멸에 대하여 의심이나 의문을 가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오취온의 생성소멸을 스스로 경험하여 알 수 있다.따라서 생성소멸하는 오취온을 자아의 유무라는 견해로 집착하지 않으며 이러한 유무의 견해를 일으키지도 않는다.유무의 견해를 여의어 중도를 향하고 바른 견해를 갖는다.
이 다섯 가지 중도의 실례에서 나오는 양극단의 사견뿐만 아니라 모든 양극단의 사견을 따르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 곧 중도이다.따르지 않고 벗어나야 하는 사견을 따르지 않고 벗어난 상태를 그냥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따라서 중도란 모든 사견을 따르지 않고 벗어난 상태요,모든 사견을 여읜 상태요,어떠한 사견에도 입각되어 있지 않는 상태요,어떠한 사견에도 의존하지 않는 상태다.중도란 사견의 끝이요,사견의 끝남이요,사견의 소멸이다.중도란 사견의 소멸로 시작하여 그 소멸의 완성으로 끝나는 전 과정이다.즉 중도의 시작은 사견의 소멸의 시작이고 중도의 끝은 사견의 소멸의 완성인 것이다.사견과 그 폐해를 이해하여 사견을 벗어나기 시작하여 진리를 깨달아 정각을 이루는 전 과정이,곧 중도로 시작하여 중도를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이다.중도를 완전히 깨달았다는 것은 곧 모든 사견의 소멸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사견을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을 알아 그 바탕을 소멸하는 것이다.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을 알기 위하여 연기법을 알아야 하며,연기법을 알면 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을 알 수 있다.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은 갈애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단지 느낀 것(受)에 지나지 않으며,이러한 느낌은 촉(觸)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촉 없이도 그런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육입 六入을 통해 계속해서 일어나는 촉으로 느낌을 경험하고 받아들인다.그런 느낌으로부터 愛애가 생기고,애로부터 취가 생기고,취는 유를 생기게 하고,유는 생을,생은 노사와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을 생기게 한다.따라서 촉의 달콤함과 위험,촉이 일어나는 바탕,촉이 일어나는 바탕의 사라짐,촉이 일어나는 바탕의 사라짐으로 인도하는 길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안다.이것이 모든 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임을 알아,사견의 바탕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보고 안다.또한 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을 제거하고 뛰어넘기 위하여 사념처 四念處에서 신념처를 내신관,외신관,내외신관, 세 가지로 수행을 하여야 하되 수,심,법에 대한 수행도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사념처의 삼종수행으로 사견이 일어나는 바탕을 소멸할 수 있다.따라서 사견의 소멸은 중도이고,중도의 성취는 연기법과 수행법에 직결되어 있다.사 邪의 소멸 자체가 곧 정 正의 드러남이라고 하면 사의 소멸인 중도가 곧 정이다.사의 소멸의 시작이 곧 정의 드러남의 시작이며,사의 소멸의 완성이 곧 정의 드러남의 완성이다.따라서 중도의 시작이 곧 정의 시작이며,중도의 완성이 곧 정의 완성이다.그러므로 중도는 곧 정이다.따라서 중도에서 보는 것이 곧 정견이다.즉 중도는 정견이라는 안목을 만드는 것이다.정견은 진리와 합일하여 진리와 어떠한 괴리나 모순이 없는 진리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사견 없이 보는 것이다.중도에서 사유하는 것이 곧 정사유이며,중도에서 말하는 것이 곧 정어가 되는 것이며,중도에서 행동하는 것이 곧 정업이다.진리로 이끄는 바른 수행법인 팔정도는 중도로 시작하며,중도로 시작하였을 때 팔정도로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의 시작은 사견을 여읜 중도이므로 불교의 시작은 곧 중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