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야 남을 안다
완전한 굴복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고 명상한다.마음속에서 탐욕과 분노,싫어함의 감정이 일 때 우리는 무관심하지 않다.그런 감정을 방치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탐구한다.그런 감정이 이미 마음속에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해로움을 주는지 명상하고 이해한다.그러한 감정을 믿고 따라갈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깨닫는다.이러한 깨달음은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그래서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과 명상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연구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말한다.
"명상만 하는 승려들은 자기 생각만 따르는 거야.그들의 배움에는 근거가 없어."
사실 어떤 면에서 공부와 수행은 아주 똑같다.손등과 손바닥같다.손을 앞으로 내밀면 손등이 없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손을 뒤집으면 이번에는 손바닥이 없는 것 같다.그러나 손바닥 역시 어디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수행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결과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행을 그만두고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한다.그러나 진리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법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그 순간 법은 곧 놓아 버림이 된다.이것이 바로 완전한 굴복이다.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집착이 있다 해도 천천히 줄어든다.
우리가 말하는 공부는 이런 것이다.눈이 공부의 대상이고 귀가 공부의 대상이며 세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다.우리는 눈이 인식하는 형태가 어떤 모양인지 알지만 그 형태에 집착하고,집착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한다.또 소리를 분간하지만 그 소리에 집착한다.형태,소리,냄새,맛,촉감,정신적인 감흥은 모든 존재를 함정에 빠뜨리는 올가미와 같다.
이런 것들을 공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마음에서 어떤 감흥이 일면 우리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에 의존하여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교리를 꿰뚫고 있다면 곧바로 이론에 의지하여"이러한 일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일어나서 이러이러하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교리를 공부하지 않았다 해도 평상시의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다.이것이 법이다.지혜가 있다면 평상시의 마음을 관찰하고 그것을 공부할 수 있다.그것은 결국 경전 공부와 똑같다.평상시의 마음이 곧 교리이다.붓다는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감흥을 받아들이고 탐구하라고 하셨다.우리는 평상시의 마음을 교리로 삼고 마음이라는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믿음이 있다면 교리를 공부했느냐 안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믿음이 있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수행에 정진하고 항상 인내심과 열정을 개발하게 한다면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우리에게는 수행의 바탕인 알아차림이 있다.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우리는 항상 알아차린다.알아차림이 있다면 분명한 이해도 있다.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는 함께 일어난다.순식간에 발생하기 때문에 두 가지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다만 알아차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분명한 이해도 있다. 우리의 마음이 확고하고 안정적이면 알아차림이 쉽고 빨리 일어나며 그곳에서 지혜도 바로 생겨난다.그러나 때로는 지혜가 부족해서 알맞은 때에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가 있다 해도 그 두 가지만으로는 상황에 대처하기에 부족하다.일반적으로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는 마음의 기반이며 지혜가 그것을 돕는다.우리는 통찰 명상을 통해 끊임없이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마음속에서 어떤 감흥이 일어나든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무상,고통,무아가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저 하나의 감흥일 뿐,그 감흥에는 주체도 실체도 없고 저절로 사라질 뿐임을 안다.미혹에 빠진 자,지혜가 없는 자는 이것을 놓친다.또한 이러한 감흥을 이롭게 이용할 줄도 모른다.지혜가 있으면 반드시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도 있다.그러나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지혜가 완전히 선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따라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가 모든 대상을 붙잡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지혜가 도움을 줄 것이다.지혜는 어떤 수준의 알아차림이 있고 어떤 종류의 감흥이 일어났는지 볼 수 있다.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알아차림이 있든,어떤 감흥이든 모두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붓다께선 통찰 수행을 수행의 기반으로 삼으셨고,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조차 모두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아셨다.세상의 모든 불안정한 것과 우리가 안정되기를 원하는 것은 고통을 일으킨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욕망대로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이것은 때묻은 마음,지혜가 없는 마음의 작용이다.수행을 하다 보면 쉽게 수행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수행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그런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 멀리 바라볼 필요는 없다.그저 자신의 몸을 바라보라.나의 몸은 내가 원하는 모습인가?우리는 몸이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고 바라다가 조금 있으면 또 다른 모습이기를 원한다.한 번이라도 몸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었던 적이 있는가?몸과 마음의 본질을 아주 똑같다.모두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수행에서 우리는 그 점을 놓치기 쉽다.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고 기쁘게 해주지 않는 것들을 버린다.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인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그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르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들면 옳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그렇게 생겨난다.눈과 귀,코와 혀,몸과 마음의 경로로 자극을 받으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발생한다.이것은 마음이 집착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 준다.그래서 붓다께선 우리에게 무상과 만물을 사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다 보면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 따라 움직여 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우리에게는 그러한 권위나 능력이 없으므로 세상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그렇게 되기를 원해도 이 세상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이런 식의 원함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혹에 빠진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얼마나 다르게 이해하는지 알 수 있다.지혜가 있는 마음은 어떤 감흥이 느껴질 때 그 감흥을 집착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본다.그것이 곧 지혜이다.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어리석음을 따른다.어리석은 마음은 무상과 고통,무아를 보지 못한다.그저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선한 것,옳은 것이라고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본다.이런 식으로는 법에 도달할 수 없고 지혜를 얻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