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켜보라
팔정도를 예로 들어 보겠다.지혜로 세상을 통찰하면 바른 견해가 바른 생각,바른 말,바른 행동으로 우리를 이끈다.이 모든 과정에는 진리를 알면서 생기는 심리 조건이 작용한다.앎은 어두운 밤길을 비추어 주는 호롱불과 같다.우리의 앎이 올바르고 진리와 일치한다면 발길이 닿는 곳마다 환하게 비추어 줄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든 모두 그러한 앎 속에서 일어난다.마음이 없다면 앎도 없을 것이다.모든 것이 마음의 현상이다.붓다께서 말씀하셨듯이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이다.존재도,개인도 아니며,하나의 주체도,당신 자신도 아니다.마음은 우리도 그들도 아니다.법은 그저 법일 뿐이다.자연의 이치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그것은 우리의 것도,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그 무엇도 아니다.인간의 경험은 무엇이든 오온에 다름 아니다.그는 그 모든 것을 놓아 버리라고 하셨다.
명상은 한 개의 나무토막이다.나무토막의 한쪽 끝은 통찰 명상이고 반대쪽 끝은 선정 명상이다.나무토막을 집어 들면 둘을 다 들게 된다.그렇다면 어느 쪽이 선정이고 어느쪽이 통찰일까?두 가지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가?모두 마음이다.처음에는 명상을 통해 도달한 평화 상태에서 마음을 집중하고 통합한다.그러나 선정의 평화와 고요가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고통이 일어난다.왜 그럴까? 선정 명상으로 얻은 평화는 집착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집착 역시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평정은 길의 끝이 아니다.붓다께선 그러한 마음의 평화가 궁극적인 목표가 아님을 체험을 통해 깨달으셨다.붓다의 수행이 아직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윤회의 원인은 여전히 소멸하지 않고 존재했다.왜일까?여전히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붓다께선 선정에 든 상태에서 다시 조건 지워짐의 본질을 명상하고 탐구하고 분석하셨고,결국 모든 집착,평정에 대한 집착마저 떨쳐 버리셨다.선정 상태조차 조건 지워진 세계의 일부였으며,인습적인 진리의 일부였다.선정의 평화에 집착하는 것 역시 인습적인 진리에 집착하는 것이며,그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선정의 평화에 대한 집착은 결국 또 다른 생성과 윤회를 낳는다.마음의 불안과 동요가 가시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평화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붓다께선 생성과 윤회의 바탕이 되는 원인과 조건을 탐구하셨다.완전히 꿰뚫어 볼 수 있을 때까지,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선정 상태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로 생성되는지 명상하셨다.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이처럼 존재로 생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셨다.오온은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이이다.손을 데지 않고 뜨거운 쇳덩이를 만질 수 있는가?어디 한 곳 차가운 데가 있는가?위를 만져 보고,옆을 만져 보고,아래를 만져 보라.단 한 곳이라도 차가운 곳이 있는가?없다.쇳덩이는 어디를 만져도 뜨겁다.우리는 평정에조차 집착해서는 안 된다.평정 상태에 자아를 동일시하는 것.이를 테면 "아무개는 평화롭고 고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독립적인 자아나 영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식의 자아 개념은 인습적 진리의 일부일 뿐이다.'평온하다''화가 났다''선하다''악하다''행복하다''불행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많은 생성과 윤회에 갇혀 있다는 의미이다.보다 많은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행복이 사라지면 불행해진다,슬픔이 사라지면 다시 행복해진다.이러한 순환에 빠져 들면 끊임없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야 한다.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붓다께서는 이미 이러한 마음의 이치를 이해하셨다.생성과 윤회의 조건이 아직 멈추지 않았음을 아셨다.아직 수행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원인 때문에 생성이 있고 생성으로 인해 죽음이 있다.이 모든 움직임은 왔다가 사라진다."라고 생각하셨다.
붓다께선 오온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 다섯 가지를 명상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모든 정신적,육체적인 것,인지되고 사유되는 것은 예외 없이 조건 지워진 것이다.이것을 간파한 붓다께선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셨다.모두 버리고 진리로 세상을 이해하라고 하셨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이 온다고 했다.이 모든 것을 놓아 버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진리를 깨닫게 되면,그 모든 것이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은 실체도 없고 그 무엇도 아니다.마음은 누구의 소유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인간의 소유물처럼 소멸하지 않는다.사실 마음은 자유롭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 어떤 문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마음에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마음이 조건 지워진 것들과 자아라는 개념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붓다께선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을 관찰하라고 하셨다.처음에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는가?아무것도 없었다.마음은 조건 지워진 것들과 함께 생겨나지도 않고 그것들과 함께 죽지도 않는다.좋은 것을 만난다고 마음이 좋은 것으로 변하지도 않는다.마찬가지로 나쁜 것을 만나도 나쁜 것으로 변하지도 않는다.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을 때 이런 일이 가능하다.마음은 실체가 없는 일련의 상태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생긴다.
붓다의 통찰은 마음의 모든 현상이 무상,고통,무아임을 간파하셨다.그리고 우리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진리로 세상을 보기를 원하셨다.진리를 아는 마음은 행복이나 슬픔을 만나도 동요하지 않는다.행복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생성이다.슬픔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죽음이다.죽음이 있으면 생성이 있고 생성된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이러한 생성과 소멸은 끝없이 존재의 궤도를 순환한다.수행자가 이런 이해의 경지에 오르면 앞으로 다시 생성과 윤회가 일어날지에 대한 의심은 남아 있지 않다.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필요가 없다.붓다께선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을 철저히 탐구했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오온도 모두 버리셨다.오직 그 모든 과정을 초연하게 지켜보는 앎만이 남아 있었다.유쾌한 감정이 일어도 그 감정에 동화되지 않고 그저 그 감정을 관찰하고 깨어 있었다.불쾌한 체험을 할 때도 불쾌함에 동화되지 않았다.왜일까?붓다의 마음은 감정의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붓다께선 진리를 꿰뚫어 보셨다.윤회의 조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이것이야말로 확실하고 믿을 만한 깨달음이요,진정으로 평화로운 마음이다.
깨달음은 태어나지도,나이들지도,병들지도,죽지도 않는다.원인도 결과도 아니며,인과관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조건 지워짐의 과정에도 휩쓸리지 않는다.원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더 이상 조건 지워짐도 없다.이제 마음은 생과 사를 초월하고 행복과 슬픔,선과 악을 초월한다.그런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마음은 언어를 초월했다.그와 함께 모든 조건들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려는 것마저 하나의 집착일 뿐이다.말은 마음의 이론일 뿐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관한 이론적 설명은 정확하지만 붓다께선 그런 류의 지식은 그다지 쓸모가 없음을 깨달으셨다.머리로 이해하고 믿을 수는 있겠지만 그런 지식은 우리에게 진정한 이로움을 주지 못한다.지식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붓다의 깨달음은 놓아 버림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그 깨달음은 버림과 포기로 우리를 인도한다.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옮음과 그름에 휩쓸리게 한다.현명한 사람이라면 옳은 일에 휩쓸릴 것이고 어리석은 자라면 그른 일에 휩쓸릴 것이다.이러한 마음은 속세의 마음이며 복을 받은 자는 이러한 속세의 것들을 통해 이 세상을 관찰한다.세상 만물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을 완전히 이해한 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