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海記行

놓아버림

낡은집에사는남자 2016. 12. 16. 21:18




 승려들도 한때는 평신도였다.예전에는 평신도의 인습 속에서 살았고 지금은 '승려'의 인습 속에서 살고 있다.다시 말해,해탈을 통해 승려가 된 것이 아니라 인습을 통해 승려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수행 초기에는 이러한 인습을 따르지만 계를 받는다고 번뇌를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모래 한 줌을 소금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한다고 해서 소금이 되는가?이름만 소금일 뿐 실제로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모래로 음식을 만들 수도 없다.합의하에 모래를 소금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사실 모래는 모래일 뿐 소금이 아니다.해탈이란 말 자체도 사실은 인습이지만 인습을 초월한 어떤 것을 지칭한다.자유를 성취하고 해탈에 도달했을 때도 우리는 인습에 따라 '해탈'이라고 말한다.인습이 없다면 소통을 할 수 없을 테니 이런 인습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는 셈이 된다.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만 사실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이름이 없다면 여러 명 중 한 명을 불러야 할 때 "이봐요!거기 있는 사람!"하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봐야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이봐요,존!"하고 부르면 '존'이라는 사람이 온다.이름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다.우리는 이름을 통해 소통하고 이름은 모든 사회적 행동의 바탕이 된다.따라서 인습과 해탈 모두를 이해해야 한다.인습도 쓸모가 있지만 사실 인습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우리 인간조차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인간은 여러 가지 원소들의 집합체로,임의적인 조건에 따라 태어났다가 조건에 의지하면서 잠시 존재하다가,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라진다.이 과정을 거스러거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러나 인습이 없다면 이름도,수행도,일도 없을 테니 우리에겐 할 이야기가 없다.관례와 인습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의삭소통을 위해 만들어졌을 뿐이다.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과거에는 동전이나 지폐가 없었다.사람들은 물건을 서로 교환했다.그러다가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돈을 만들었다.아마도 미래의 어느 대통령은 돈을 쓰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돈 대신 왁스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것이 인습의 진리이다.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기란 참으로 어렵다.우리의 돈,집,가족,자식,친지들은 인간이 만든 인습일 뿐 법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상하겠지만 이것이 진리이다.이런한 것들은 인습의 틀 안에서만 가치를 지닌다.우리가 그런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인습을 만들면 곧바로 가치가 없어지고,그런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습을 만들면 가치가 생긴다.인습이란 필요에 의해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