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海記行

나를 알아야 남을 안다

낡은집에사는남자 2022. 4. 7. 09:18

원함이든 원하지 않음이든 모두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일 뿐이다.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명상 수행이 우리를 깨달음으로 인도한다.커다란 물고기가 걸려든 그물을 끌어올리는 낚시꾼을 생각해 보라.그물을 끌어올릴 때 낚시꾼은 어떤 기분일까? 물고기가 달아날까 두려워 허겁지겁 그물을 끌어당길 것이다.그러다가 아차!하는 순간 물고기는 그물에서 빠져나간다.너무 애를 쓴 탓이다.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물을 모아 천천히 끌어올려야 한다.수행도 마찬가지이다.수행의 길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조심스럽게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가끔 보고 싶지도,알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다.그럴 때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계속 더듬으며 찾아야 한다.그것이 수행이다.수행하고 싶을 때 수행하고,수행하기 싫을 때도 수행해야 한다.그렇게 오직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열정적으로 수행에 몰입하면 믿음이 우리가 하는 일에 에너지를 준다.그러나 그 단계에서는 아직 지혜가 없다.열정적으로 수행에 정진해도 많은 것을 얻지는 못한다.수행을 계속해도 길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평화와 평정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수행에 필요한 자질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수행의 길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만다.그 단계에서 우리는 무척 조심하며 끈기와 인내를 발휘해야 한다.커다란 물고기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길을 더듬어 가고 조심스럽게 끌어당겨야 한다.몸부림치는 물고기를 다루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멈추지 않고 천천히 끌어올리면 된다.물고기가 지쳐 더 이상 펄떡이지 않으면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바로 그것이다.수행은 천천히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다.명상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불교 교리에 관한 특별한 지식이 없다면 일상의 체험을 통해 명상해야 한다.이미 알고 있는 지식,일상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그런 지식이라면 그리 낯설지도 않다.사실 공부를 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다.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마음은 마음이다.붓다가 세상에 오셨든 오지 않으셨든 이 세상은 똑같다.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본래의 성질대로 존재하고 있었다.자연의 이치는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항상 그렇게 있었다.바로 이것을 궁극적 진리라고 한다.그러나 궁극적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보아도 알아볼 수 없다.마음을 멈추기 전,평정에 도달하기 전에는 마음이 예전과 똑같이 움직인다.스승들이 "꾸준히 수행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다.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그러나 먼저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으면 지혜는 떠오르지 않는다.그래서 "꾸준히 수행하라."고 하는 것이다.수행을 계속하다 보면,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며 수행에 회의가 들기 시작할 때가 있다.곧바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에는 수행의 결과를 볼 수 없다.나뭇가지 두 개를 비벼서 불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이렇게 하면 불씨가 일어난다고 하던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나뭇가지를 비벼 대는 것과 비슷하다.나뭇가지를 비비다 보면 마음이 조급해진다.그래도 계속 나뭇가지를 비빈다.불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그는 낙담하고 잠시 쉰다.그러다가 다시 시작한다.그러나 이번에도 잘 되지 않고 그는 다시 쉰다.그러다 보니 열기도 사라진다.충분히 비비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지칠 때까지 나뭇가지를 비비다가 결국 완전히 포기한다.지친 것은 물론 깊이 좌절해서 결국엔 "불 따위는 없어!"라고 말하면서 완전히 포기하고 만다.사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불이 일어날 만큼 열기가 모아지지 않았던 것이다.불은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그가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이다.이런 경험은 수행자들을 좌절하게 만든다.그래서 조바심을 내고 이런저런 수행법을 시도한다.사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한다.왜일까? 아직도 번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붓다에게도 번뇌가 있었지만 지혜도 있었다.출가하기 전 붓다나 다른 아라한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속세의 인간으로 살면 바로 생각하지 못한다.원함의 마음이 일어도 보지 못한다.원하지 않음의 마음이 일어도 보지 못한다.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만족스럽다.원하지 않음이 있으면 한편으로는 만족하고 또 한편으로는 혼란스럽다.반면 원함이 있을 때는 다른 종류의 만족과 혼란이 있다.항상 이런 식으로 뒤엉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