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두 얼굴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명상한다면 우리도 전혀 새로운 수준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대상을 바라보아도 그 대상은 없다.소리를 들어도 소리가 없고 냄새를 맡아도 냄새가 없다.이 모든 것은 현상일 뿐이며 영원하지 않다.그저 왔다가 사라지는 감각일 뿐이다.이렇듯 진리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할 때 감각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그저 왔다가 갈 뿐이다.사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도 그들도 없다.우리가 없다면 우리의 것 또한 없다.이런 식으로 고통이 소멸한다.고통을 겪는 자가 없다면 고통을 주는 자가 누구이겠는가?고통이 있으면 우리는 고통에 집착한다.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마찬가지로 행복이 있을 때는 행복에 집착한다.감정에 대한 집착은 자아의 개념을 만들고 끊임없이 우리,혹은 그들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그러한 개념들이 우리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궤도로 끌어들인다.그래서 우리는 명상하고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나 숲 속에 들어와 살고 있다.우리는 달아났다.두렵거나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 만족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은 숲 속에 사는 것에 집착한다.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 속의 삶에 집착하는 것과 똑같다.그래서 결국 숲 속에서도 길을 잃고 도시에서도 길을 잃는다.
붓다께선 숲 속의 삶을 칭찬하셨다.정신적 육체적 고립이 해탈을 위한 수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는 숲 속에서의 삶에 의지하면서 숲 속의 평화와 고요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우리는 지혜를 깨닫기 위해 이곳에 왔다.숲 속에서 우리는 지혜의 씨를 뿌리고 가꾼다.혼돈과 혼란이 있다면 씨앗은 자라지 않는다.숲 속에 사는 법을 터득했다면 온갖 감각적 자극이 난무하는 도시 생활에서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숲 속에 사는 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곧 지혜를 키우고 개발함을 뜻한다.그 지혜는 어디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지혜이다,
감각의 자극을 받으면 우리는 동요한다.감각은 우리의 적이 된다.아직 어리석고 ,감각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에 적이 되는 것이다.그러나 사실 감각이야말로 우리의 스승이다.우리가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참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감각과 감각의 대상을 적으로 여긴다.그러나 참지헤를 깨달았을 때 감각은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며 통찰과 분명한 깨달음의 관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