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海記行

물론 스물다섯 때 홀깃 지나쳐간

낡은집에사는남자 2017. 5. 22. 21:51




깨어남의 경험 덕분에,그 모습이 실제로 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깨달음을 경험한 후에도 흔히 그렇듯이,에고의 구조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몸이 다시 좋아지자 나는 그 질병을 어떤 멋진 선물로,어떤 은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어찌 생각해보면 그 질병은 나를 그야말로 약골로 만들어놓아 그 와중에 운동선수가 아니면 안 된다는 에고의 강박으로부터 풀려나 안도의 숨을 돌리게끔 만든 셈이다.그건 문자 그대로,아무것도 아닌 자,그 누구도 아닌 자가 된 안도감이었다.그 경험은 심지어 내가 스룰다섯 때 깨달아 얻었던 것보다도 더 사무치는 느낌을 가져다주었다.나는 그 누구도 아니며,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창조되지도 않는다는 깨달음말이다.그토록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느낀다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에고의 자아가 용해되고 부서지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회고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하지만 몸이 좀 나아지자 나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나는 신체적인 훈련을 언제나 좋아했다.몸을 쓰는 일이 좋았고,육체적인 활동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숲을 지나고 산을 넘고 내가 살던 주변을 돌면서,나는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기쁨을 만끽했다.그 기쁨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는데-,이젠 더 이상 누구와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과 함께,운동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대단했기 때문이다.누구를 신체적으로 물치칠 일도 없었기에 그저 자전거를 타는 걸로 족했다.     그런데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전거를 타며 즐기는 것만으로 끝나지가 않았다.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마치 다시 사이클 경주선수라도 된 것 마냥 훈련 때의 섭생으로 옮겨갔다.분명 나는 예전의 사이클 경주 선수는 아니었다.수년전에 이미 은퇴한 몸이었다.그럼에도 나는 마치 경기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훈련하고 있었다.나는 이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럴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나도 알고 있어,지금 훈련하고 있는 이게 결국은 에고의 인격구조를 다시 만들어내려고 하는 짓이란 것쯤은 말이지."당시의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까지는 인식하였으나 ,그것을 놓아보낼 정도로 깨어 있지는 못하였다.나는 아직 자신을 새로 일으켜 세우기를 포기할 준비까지는 되어 있지 않았다.그리하여 나는 마치 올림픽에 출전이라도 할 것처럼 훈련에 몰입했다.1년이 지난 후에 나는 전과 똑같이 심한 증세로 해서 6개월 동안을 다시 앓아 누웠다.다시 한번 육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는 자아상이 모두 빠져 나갔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어야 한다거나 어떤 특정한 시각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데에 다시금 커다란 안도감을 느꼈다.두 번째로 아픈 이후로 ,나는 이제 다시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는 과거의 낡은 배역을 되찾으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다.그 후에도 여전히 운동을 하거나 몸을 늘리는 것이 즐겁긴 했지만,그때의  두 번째 질병으로 해서 육체적 이미지로 형성된 자아상을 찾으려는 에고의 경향은 완전히 뿌리뽑혀버렸다.그것은 커다란 안도이자 기쁨이었다.이런 성과를 영적인 수행이나 자기 질문법 또는 명상을 통해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하지만 내 경우엔,(무수한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리라 여겨지지만)에고를 녹이는 최상의 용해제는 바로 이 삶 속에서,우리 인간 존재의 씨줄 날줄 안에서 ,나날의 경험으로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 안에서 발견되었다.바로 이 점이 영성과 관련한 주제에서 자주 간과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회피하거나,정말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거나,자신의 오해와 망상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영성을 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