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서
공연히 스스로 집착하고 욕심을 일으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왜 이렇게 인생은 괴로운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스스로 욕심을 만들고 집착을 만드니 그로 인해 괴로운 것인데,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부처님꼐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빈다고 그것이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본래부터 행복했었다는 그 사실만 깨닫고,욕심과 집착은 내가 허상이 실제인 줄 착각하여 만들어 낸 것인 줄 올바로 깨달으면 그뿐이다.
어떤 한 이성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라.본래부터 내 여자,내 남자가 어디 있는가.이 세상에 본래부터 절대적인 내 여자,내 남자란 있을 수 없다.다만 인연따라 이번 생에는 내 남편도,내 아내도,내 애인도 되는 것이고,또 다음 생이나 전생에는 또 다른 사람의 아내요 남편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혹은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사람이 이번 생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윤회를 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보통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다인 줄 알고,그 사람만이 나의 인연인것 같고,그 사람 없으면 안될 것 같고 못 살것 같이 느끼지않는가.그러나 그 사람과의 사랑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또 어떤가.옛 사랑은 잊혀지고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가.물론 여전히 전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괴로울 것이지만,그 애착과 집착만 끊어버리면 또 다른 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니 어떠한가.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바로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애착이다.즉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내 여자''내 남자'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다.그건 누가 만들었는가.본래부터 고정되게 나에게 있어 왔는가.그렇지 않다.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사랑하는 감정,애착의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헤어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그 원인도 나에게 있고 그 해답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내가 붙잡아 내 것으로 하고자 애착을 내었으니 붙잡은 그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나인 것이다.그걸 어찌 부처님께서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그 마음은 내 마음인데,내 마음 내 스스로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방하착,그 집착을 놓을 수 있어야 내 마음의 괴로움도 녹아내릴 수 있는 것이다.그 마음을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으면 나만 괴롭다.때로는 그 괴로운 마음,질투의 마음이 생각지 못한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지 않은가.못 이룬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하거나,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떠나갔다는 이유로 해치려 하지를 않나,그 모두가 스스로 한 사람을 택해 집착을 하면서 그 사람을 '내 사랑'으로 붙잡아두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불행이다.그러니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일 뿐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해서 마음에 집착과 애착을 놓아서 다시 편안해졌다고 치자.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괴로움을 없앤 것인가.물론 없앤 것이기는 하지만,본래부터 없던 괴로움을 제 스스로 만들었다가 그 괴로움에 스스로 아파하다가 다시 그 괴로움을 놓아버린 것이 집착이 본래부터 없던 사람이 보기에는 참 공연한 일을 벌인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공연히 제 스스로 집착하고 그로 인해 아파하고 다시 그것을 놓아버린 것이니 아무일 없는 사람에게는,집착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꾸민 것이 되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은,'아무 일 없다'는 것이다.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다.다만 이 세상에 이처럼 수많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은 공연히 스스로 붙잡아 만들어 냈기 떄문에 일어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만든 일조차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그러나 결국에는 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본래 고요하다.아무 일도 없다.괴로움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괴로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다만 신기루처럼,환상처럼,제 스스로 집착을 만들어내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내 것이 안되니 괴로워하고,혹은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잠시 기뻐하다가,언젠가 다시금 그 집착의 대상이 소멸될 때 괴로워 하는 것일 뿐이다.그러나 우리가 만들어낸 집착의 대상은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모두 언젠가는 소멸되고 만다.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하고 마는 것들이다.항상하지 않아 제행무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제법무아이며,그렇게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인 것이다.즉 일체개고인 것이다.그러나 항상하지 않아 실체가 없는 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가 텅 빈 고요함이요 열반적정의 순간인 것이다.즉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기 때문에 무집착하고 이미 집착한 것은 방하착하면 그것이 바로 열반적정의 깨달음이란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께서 깨달은 어떤 법이 있겠는가.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집착을 만들어 내지 않으셨다.스스로 '나다'하는 아상을 만들지 않았으며,'내 것'이라는 소유의 아집을 일으키지 않으셨다.스스로 집착과 애착,욕심과 번뇌를 만들지 않았는데 다시 놓을 것이 무엇인가.다시 놓을 것도 없고,집착을 버릴 것도 없으며,아상을 버릴 것도 없고,다시 내 어리석음을 없앨 것도 없다.이미 처음부터 텅 비었고,고요했으며,열반적정에 머물렀기 떄문이다.그러니 어찌 부처님꼐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어떤 법을 별도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사실은,본질에 있어서는 우리들 또한 이미 깨달아 있다.이미 텅 비어있고,고요하며,열반적정에 머물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낸 꿈같고 공연한 집착만 놓아버리면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우리의 본래 생명자리인 불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그것이 바로 귀의(歸依)다,돌아가 의지함이다.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이 이 의미다.부처님께 귀의하고.가르침에 귀의하며,청정한 수행자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내 안의 자성부처님께 돌아가고,내 안의 이미 구족되어 있고 충만한 가르침에 돌아가 의지하며,내 안의 자성청정한 수행자의 성품으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실은 돌아갈 것도 없다.온 곳이 없으니 갈 곳도 없다는 말이다.다시 갈 곳도 없고,다시 깨달을 것도 없이 다만 알면 된다.내가 공연히 집착하여 잡고 있었고,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자각하면 된다.공연한 집착과 착각,이것을 무명,즉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이 무명만을 없애면 본래 밝은 지혜가 드러난다.이렇듯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요,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는 것이다.